작가의 집으로(To the Writer’s Home), 홍시(Hong-C), 2016

작가의 집으로(To the Writer’s Home), 홍시(Hong-C), 2016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이다. 밑바닥이 해진 가방에 카메라와 스케치북, 책 한 권을 챙겼다. 무거워진 가방과 달리 마음은 한결 가볍다. 누레진 흰 운동화를 구겨 신고 후텁지근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훈훈한 냄새가 여행자의 몸을 안온하게 감싼다.

어릴 적부터 실내보다 바깥을 좋아했다. 엄마는 땅거미가 질 때까지 귀가하지 않는 초등학생 딸을 찾아 헤맸고 - 주로 학교 뒤 공터에서 발견되었다. 땟국물을 흘리며 피구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 , 초록색 교복차림의 중학생 딸을 미술학원이 아닌 시장 통에서 찾아냈다. 자연스레 엉덩이가 무거워진 고3 시절. 그때는 문학으로 시간여행을 했다. 책을 통해 「쉽게 씌여진 시」가 쓰인 1942년 일본으로, 「동백꽃」의 점순이가 살던 1930년대 농촌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얀 종이 위의 활자는 흰 나비처럼 날아올라 미지의 곳에 내려앉았다.

2012년, 삼성그룹 대학생 기자에 지원하여 열정운영진 활동을 시작했다. 숱한 사람과 인연을 맺었고, 임직원에게 작문법과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다. ‘간결하거나, 흥미롭거나, 새로운’ 글을 욕심냈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 따위의 명칭을 익혔다. 우리나라 근대 문학 작가를 찾아다닌 건 그해 가을부터였다. 책으로 상상했던 목적지를 밟을 때마다 희열이 밀려와 발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그렇게 ‘미디어삼성(삼성 사내커뮤니티)’의 【금요고전】 코너에 ‘홀로 떠나는 고전여행’을 게재했다.

작가의 집으로(To the Writer’s Home), 넷마루(Netmaru), 2022

 

지하철과 시외버스, KTX, 가끔은 배에도 올랐다. 문학관과 생가에는 작가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초상의 눈빛에 우수가 어려 있고, 유품과 친필원고에 손때가 묻어있다. 공기에 가득한 작가의 체취는 코로 들어와 가슴에 얹혔다. 작품 배경에 찾아가 중심인물을 만나기도 했다. 작가의 눈을 빌려 바라본 정경에서 주인공이 되어 울고 웃었다. 물리적인 발걸음을 뗄 때마다 문학은 현실로 다가왔고, 막연하게 꾸며진 이야기가 아님을 알았다. 여정의 끝에서 스케치북의 여백을 채웠다. 서울에 닿을 즈음 여행자의 모습은 전과 달라 있다. 심중에 문학의 빛깔을 담았더니 타인의 삶에 눈이 뜨였다.

2012년 10월부터 2016년 6월까지 마흔세 곳을 유람했고, 마흔세 편의 글을 썼다. 그중 몇 개를 추려 『작가의 집으로』를 엮었다. 이 책에는 동시대를 공유하는 여덟 명의 시인과 여섯 명의 소설가, 그리고 네 명의 해외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여행을 앞둔 사람들에게 서정적인 문학 여행을 권하며 자그마한 책을 건네고 싶다. 미처 성충이 안 된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를 청한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미대생의 문장에서 어설픈 문향을 느끼고, 카메라 셔터음의 단면을 보며 간접적으로 동행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을 매듭짓고, 마흔네 번째 여행을 떠나야겠다.

2016년, 초롱꽃이 핀 날. 이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