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예찬

풍류 風柳

솜사탕 같은 입김이 서립니다. 어디선가 설탕의 단내가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정면에 계수나무가 있습니다. 아시나요, 움츠린 계수 낙엽에서는 솜사탕 냄새가 납니다. 찰나의 바람은 겨울 향을 품었습니다. 어느덧 향초와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지금의 공기를 코로 들이면 저는 서둘러 따뜻한 내음을 찾습니다. 혹여 찬 바람에 마음이 녹슬까 초칠을 재촉하는 걸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고 마당은 노랗습니다. 함빡 노래지기는 싫은 모양인지 가장자리에 자란 잔디가 연둣빛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습니다. 재차 불어오는 바람에 손바닥만 한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내려옵니다. 일순간 바람은 무엇을 흔들려고 저리 부는지 궁금했습니다. 이리저리 눈을 굴려보니 당신이 보이더군요.

바람이 불자 당신의 잔가지가 사선으로 춤을 춥니다. 우아한 곡선의 춤사위는 한 폭의 추상화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으로 당신을 화폭에 담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2013년, 대학교 졸업 전시를 앞두고 당신이 시야에 들었습니다. 자유분방하고 멋스러운 모습이 당시의 저와 무척 달랐던 까닭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안거리로 삼았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당신은 제게 얼룩진 그늘을 내어주었습니다. 얼굴에 일렁이는 햇볕은 으레 당신 안의 계절이 온화하다는 걸 말해주었죠. 언젠가 당신의 휘몰아치는 줄기처럼 저 역시 세상에 함성을 지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습니다. 저는 바람과 당신을 ‘풍류(風柳)’라 일컬었고, 그곳에서 풍류(風流)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그렸습니다.

산 능선을 따라 꾀꼬리단풍이 들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은 느긋합니다. 겨우 간닥간닥 흔들리는 가지 끝 이파리만이 노르께할 뿐이죠. 당신의 전부가 누렇게 될 때 즈음에는 고추바람이 파고들 겁니다. 몇 해 전 겨울, 살을 에는 바람을 피해 남쪽으로 첫 여행을 떠났습니다. 근사한 기행문을 쓰기 위해 종종거렸지만, 제 원고는 존경하는 작가의 글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불온(不溫)한 날이 계속되던 참에 부재(不才)를 핑계 삼아 별의별 서적을 집어 들었습니다. 책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던 탓일까요, 가슴께로 불안이 기어올랐습니다. 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게 당신의 그늘은 온전한 보금자리였습니다. 당신 곁에 앉아 독서를 하고, 사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상에 보잘것없는 건 없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만물을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우성은 제주도 해변을 옮긴 것처럼 초록빛으로 푸르릅니다. 그 황홀한 빛깔에 어리둥절하던 순간, 제 안에 작게 파도가 입니다. 당신도 세월의 파랑(波浪)을 면하지 못했는지 허리가 굵어졌습니다. 퉁퉁한 몸통의 끝에는 낚싯줄 같은 가지가 무수히 드리워져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처럼 풍성해져야 마땅한 거죠. 그러나 요즈음 바람에 맞서 성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형이상학적인 바람과 함께 스러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당연한 시대지요. 이런 사유를 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푸른 생명의 몸짓으로 부산합니다. 별안간 바람이 쏴 붑니다. 눈앞으로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당신은 그저 바람에 맞춰 그네를 탈 뿐입니다. 당신은 몰아치는 바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그리 당당할 수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았습니다. 사실은 가장 견고한 뿌리를 숨기고 있더군요.

문득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볼프의 법칙(Wolff’s law)’을 떠올립니다. 1892년, 독일의 외과 의사 율리우스 볼프(Julius Wolff, 1832-1902)는 동물의 골격이 충격에 따라 형태와 구조를 변화시키며 자극에 적응한다는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사람의 뼈에 지속적으로 힘을 가하면 뼈대가 더욱 강해지고, 부담이 줄어들면 다시 약해진다는 것이죠. 거센 바람에 제 몸을 맡기며 단단해지는 당신의 모습 덕분에 기억해냈나 봅니다. 분명 당신의 뿌리도 전보다 깊숙이 내려갔을 것입니다.

어느 때나 바람은 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바람이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모두에게 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더 굳세어지니까요. 바람을 피해 가재걸음 치지 않으려 합니다. 두려움과 좌절, 상처를 품에서 감내하고 어루만지다 보면 당신처럼 강성한 기둥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뿌리처럼 저의 근본도 굳건해지겠지요.

푸르스레한 당신의 낱 잎을 뜯어 좋아하는 책 사이에 끼웠습니다. 당신을 곱게 말린 페이지는 쉽사리 넘어가지 않습니다. 바람이 너무 매정할 때는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아무 때고 방문하더라도 당신의 잔잔한 물결 안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한 번 바람이 붑니다. 당신으로 인해 바람에서 빛깔을 느낍니다. 입김의 명도가 짙어질수록 당신의 채도는 떨어지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의 가지 끝에서 연둣빛의 태동이 일 테니까요. 그때는 새로운 힘으로 당신과 함께 바람을 맞이할 것입니다.

2017-11-13 이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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